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녹색의 명예

해외 영화

by silversong 2021. 9. 1. 16:54

본문

<명예가 아니라면 죽음을?>

-영화 그린 나이트 영상 저널

 

녹색은 자연의 색,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뒤덮고 아주 조용히 정복할 이끼의 색. 번영과 환희를 뜻하지만, 죽음을 부르는 불길한 색. 단 한 번도 열정이나, 욕망의 색이었던 적이 없는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을 상징하는 그것. 명예를 가지고 싶다면, 도전하라. 녹색의 기사에게.

 

그린나이트 공식 포스터

 

영화는 아서왕 전설에서 가웨인과 녹기사서사시를 영상화했다. 크리스마스, 연회가 벌어지고 있던 궁 안으로 녹색의 기사가 말을 타고 나타나 자신의 목을 베는 이에게 명예와 부를 주고 일 년 후 크리스마스 날, 녹색 예배당에서 그가 자신에게 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이야기한다. 내기를 승낙한 것은 어린 가웨인 경. 그는 도끼로 단번에 녹기사의 머리를 잘라내지만, 녹기사는 잘린 머리를 들고 유유히 연회장을 떠난다. 가웨인 경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예배당을 찾아 나서고 여정 중 아름다운 성의 주인 버틸락과 그의 부인을 만나게 된다. 성주인 버틸락은 녹색 예배당이 근처라며 자신의 성에 머물다 갈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버틸락은 사냥을 떠나며 가웨인에게 사냥에서 잡은 모든 것을 가웨인에게 줄 테니, 그 역시 성에서 받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달라 말한다. 가웨인은 이를 승낙하고 버틸락은 사냥을 떠났다. 남편이 사냥을 간 사이 버틸락 부인은 가웨인을 유혹하고 가웨인은 단 한 번의 키스를 허락한다. 이후 버틸락이 사냥에서 돌아오자, 버틸락은 사냥감을, 가웨인은 자신이 받은 키스를 상대에게 건넨다. 마지막 날이 되자 버틸락은 사냥감을 건넸다. 그러나 가웨인은 버틸락 부인에게서 받은 행운의 녹색 허리띠(거들)를 숨긴 채 주지 않았다. 드디어 녹색 예배당에서 다시 만난 가웨인과 녹기사. 녹기사는 가웨인의 머리를 자르려 하는데, 첫 번째는 가웨인이 겁을 먹고, 두 번째는 망설였으며, 세 번째에는 작은 상처만을 남길 뿐이었다. 이후 녹기사는 자신이 바로 버틸락 성주라며 모든 내기가 아서왕의 동생인 모건 르 페이의 짓이라 말한다. 둘은 헤어지고 가웨인은 녹색 허리띠가 정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여기고 그것을 지닌 채 집으로 돌아온다.

 

 

원작에서는 가웨인의 정직을 시험하는 버틸락과 원탁의 명예로움을 시험하는 모건 르 페이의 의도가 숨어 있다. 이로 인해 기사에게 중요한 덕목이 정직과 명예였음을 알 수 있는 맥락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를 조금 비틀어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가웨인이 자신만의 무용담을 가진 기사로 나오지 않는다. 책임지지 못할 사랑을 하며 어머니에게 기대어 사는 청년일 뿐이다. 또한 그는 잠깐의 기세로 녹기사의 머리를 베었으나 향후 일 년 동안을 불안감에 묶여 산다. 원작에서 그의 기사도나 영웅심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영화에서는 가웨인이 얼마나 형편없는 기사인지, 영웅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물인지를 보여준다. 원작에서 가웨인이 버틸락 부인에게 받은 허리띠를 숨긴 것을 기사답지 못함, 정직하지 못함으로 여겼다면 영화에서는 이와 동시에 1. 인생을 허비하며 여자, 술에 찌들어 삶 2. 버틸락 부인의 유혹에 넘어가 삶에 집착하느라 그녀에게 수음하며 허리띠에 자신의 체액을 남김 3. 녹색의 기사와의 내기를 회피하고 결국 집으로 향함 (추후 다시 설명) 등을 보여주며 가웨인이 이라는 호칭을 달기에는 모자란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가웨인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영혼의 유골을 찾아 주거나, 길잡이가 되어 줄 여우를 구하는 등 그가 영웅은 아닐지언정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린나이트 스틸컷, 녹기사의 목을 자른 가웨인

 

가웨인이라는 캐릭터 외에도 영화는 기사문학 해체를 통해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원전에서는 가웨인의 명예와 정직에 대한 기사 정신을 생각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명예와 실리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한다. 주인공인 가웨인과 그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명예를 중시하고 이상을 드높인다. 기사도를 위해서라면 목숨쯤은 바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이 많다. 그의 주변에서 명예보다 실리를 챙기며 가웨인이 예배당으로 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인물은 그의 연인이자 계급이 낮은 에셀뿐이다. 기사 문학에서 명예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명예가 있고 없고가 기사를 결정하는 척도이기도 하며 그들의 이상이다. 그러나 평민의 입장에서 명예란 먹지도 못하는 허울일 뿐이다. 현실에서 동떨어진 개념이자 허황된 꿈으로 그려진다. 명예의 숭고함은 가웨인이 놓지 못하는 녹색 허리띠로, 그가 불식간에 당하는 강도짓으로, 결국 도망치고 마는 그의 비겁함으로 해쳐진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명예를 실추시키지는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는 가웨인이 현실을 붙잡고 도망갔을 때의 상황이 그려지는데, 가웨인은 평생을 녹기사의 두려움에 떨며 허리띠를 풀지 않고 그의 연인을 임신시키지만 아이만 빼앗아 오며 다른 부족의 여인과 결혼하고 전쟁에 나가 자식을 잃는다. 그를 비난하는 옛 연인의 눈초리와 그를 떠나는 기사들과 가족, 결국 패망하는 나라의 가운데서 가웨인은 결심이나 한 듯 목숨을 거두어가라며 허리띠를 풀고 결국 녹색의 기사는 가웨인의 목을 자른다. 자신이 도망친 후의 미래를 본 가웨인은 드디어 자신의 머리를 자르라고 말하게 된다. 비로소 명예를 지키게 된 것이다.

 

그린 나이트 스틸 컷, 귀여운 여우?

 

원작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나오는데, 원작의 마법사이자 내기를 설계한 마법사 모건 르 페이는 영화에서 가웨인의 어머니로 나온다. 그녀는 마녀로 이 모든 내기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데, 해석에 따라 원탁의 기사 중 누군가를 겨냥했거나, 자신의 아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만든 고난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원작의 허리띠는 영화에서 어머니와 버틸락부인이 두 번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첫 번째 허리띠는 가웨인을 향한 어머니의 보호이며, 가웨인이 강도짓으로 허리띠를 잃는 것은 그가 어머니의 보호를 벗어나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함을 알려주기도 한다. 두 번째로 가웨인이 받는 허리띠는 원작과 동일하게 버틸락 부인이 주는 것으로 가웨인의 정직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물건이자 영화에서 그가 행하는 명예롭지 못한 행위로 더럽혀지고 그의 삶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오브제이다. 영화에서는 가웨인이 내기에서 도망쳤을 때의 미래를 보여주며 명예롭지 못한 삶의 말로를 그려낸다. 동시에 열린 결말로 끝을 내며 가웨인에게 주어질 미래를 궁금하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중세의 판타지를 현대의 가치와 기조에 맞게 바꾸어 낸 호러 판타지로, 영웅담이라기보다는 인간성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에 그려진 이야기가 현대에도 어울리는 것은 그것이 가진 주제의식이 과거나 현재에도 통용되는 진리이자, 사람들의 지속적인 고찰이 아닐까 싶다. 각 챕터로 나뉘어 있어 이해하기가 쉬웠고 연출에 있어 색과 오브제로 나뉘는 상황, 인간 군상이 마음에 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전에 대해 알고 간다면 관람에 있어 수월할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 내면에 대한 고찰은 어떤 이야기를 사용하든 매력적이다. 특히 기사 같이 고결함과 명예로움을 내건 이들을 그들이 가진 반영웅적 면모, 특히 인간적인 면모로 까발리는 행위는 범인에게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한다.

'해외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실이 아닌 역사  (0) 2021.09.23
새 시대의 영웅을 위하여  (0) 2021.09.16
The Free Guy  (0) 2021.08.25
본새나는 자살특공대  (1) 2021.08.11
I'm the Boss, Baby  (0) 2021.07.28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