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It’s time to die.
-007 no time to die 영상 저널
스파이 액션의 살아있는 전설, 영국 정보국의 00 넘버 중 가장 알려진, 본드. 제임스 본드.
영웅의 끝은 난잡하고, 평범하고, 생각보다 시시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계승되는 이름들이 있다. 마블 스튜디오의 캡틴 아메리카는 스티브 로저스를 연기한 크리스 에반스를 거쳐 흑인 캡틴 아메리카, 팔콘, 샘 윌슨을 연기하는 안소니 맥키가 맡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금발의 캡틴 아메리카를 기억할 것이다. 스타트렉의 제임스 커크 선장은 윌리엄 샤트너가 오리지널이라는 사람과 크리스 파인의 잘생김을 찬미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나에게 007은 오직 다니엘 크레이그 뿐이지만, 엄마는 종종 로저 무어를 떠올리곤 한다. 한 배역을 이어 맡게 되는 배우에게는 전대 007의 영향이 크게 미치는 것이다. 배역의 세대교체에 있어서 영화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때문에 다니엘 007의 마지막 편인 007-No time to die 는, 이다지도 실망스럽다. 영화 제작진들은 영웅의 마지막을 그려내는 것에 소질이 없나보다. (엔드게임이나 이거나,,)
내가 이 영화를 추천하지 않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카테고리 별로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줄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사건의 전개가 지루하고 산발적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기둥이 되는 스토리 외에도 곁가지로 나오는 이야기들, 서사들이 너무 많고 이 때문에 쓸 데 없이 상영시간만 길어지는 것이다. 먼저 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007, 제임스 본드와 메인 빌런 '사핀' 의 대결이다. 그 과정에서
1. 사핀이 ‘헤라클레스’를 훔치는 사건.
2. 본드가 CIA와 힘을 합쳐 ‘헤라클레스’를 되찾는 사건.
3. 사핀이 본드 걸을 이용해 본드의 주적을 죽이는 사건.
4. 본드와 본드 걸의 재회
5. 본드 ‘패밀리’ 납치로 인한 최후의 결전지 이동 등 다양한 사건이 추가되었다.
각 사건들은 유기체 적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필요하지 않은 사건들도 있었고 지나치게 자세하게 그려진 사건도 있었다. 이를 처리함에 있어 개별 상황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회상 등의 다른 방법을 사용했어야 했다.
게다가 영화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1. 메들린의 과거 이야기 2. 본드와 메들린이 헤어진 이야기 등을 추가함으로써 영화의 호흡을 길어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최대한 간략하면서 임팩트있게 다루어 지거나 마치 베일 속 감춰진 이야기 처럼 흐릿하게 연출되어야 했다. 이 영화에서 과거 이야기들은 007-no time to die 와는 다른 영화처럼 보이게 되었다. 특히 메들린의 과거이야기는 메인 빌런 사핀이 등장하는 순간까지도 납득이 가지 않는 전개였다. 왜 메들린이 이 사건을 비밀로 간직했는지, 왜 이 둘 간의 관계를 마치 주종관계처럼 설정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둘 사이의 연관성이 너무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결국 사건의 초석을 위해 사용된 두 가지 이야기는 사핀과 메들린이 과거에 인연이 있음, 메들린과 본드가 헤어졌었음. 두가지를 위해 장황하게 소개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 영화에 등장한 신소재인 헤라클레스 활용에 너무 무지했다고 생각된다. 인체에 침투되는 나노봇 기술이며 신체 접촉을 통해 감염되고 특정 유전 형질, 염기 서열을 이용해 특정 인종을 몰살시킬 수도, 특정 혈통의 가족을 죽일 수도 있는 기술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스펙터 라는 단체의 사람들을 죽이는 데 사용되었는데, 특정 단체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DNA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는 없다. 때문에 영화에서 헤라클레스의 쓰임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마지막에 007에게 쓰이는 헤라클레스는 메들린과 그녀의 자식을 죽이는 것에 사용되기에 마지막, 본드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했는데, 이 역시 영웅의 하차를 위해, 다음 세대로 넘어가기 위해 사용된 억지스러운 설정이라고 생각된다. 소재에 대한 세부사항을 관객에게 전달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것은 영화의 이해도를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영화의 전체적 줄거리 뿐 아니라 각 캐릭터의 해석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먼저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 007은 바람둥이긴 하지만, 젠틀하고 능글맞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설을 퍼뜨리면서도 피임에는 실패하지 않고 적에게는 자비가 없지만, 여성에게는 친절한 스파이이다. 기본적으로 위험하지만 매력적인, 마성의 남자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는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사랑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여성을 쉽게 의심하고 비밀이 많다는 이유로 그녀를 스파이로 오해한다. 또한 팔목을 잡아끈다던가, 총알이 빗발치는 환경에 일부러 노출시킨다던가 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순간의 오해로 쉽게 여성을 버리고 추후 재회를 위해 혼외자까지 등장시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007, 제임스 본드와는 사뭇 다르다. (제 눈을 닮았다는 고루한 대사는 어떻고!) 그리고 제임스 본드와 합을 맞추는 본드 걸의 경우 제임스 본드에 대적할 만큼 힘이 있거나, 능력이 있거나, 카리스마를 가진 여성이 주로 등장했다. 흔히들 알파 메일의 여성버전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인 러브라인인 메들린은 본드걸이라기보다는 일본 소년만화에 나오는 영웅에게 트로피처럼 주어지는 히로인에 가까웠다. 그녀가 직접적으로 ‘힘’을 사용한 것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했던 두어 번의 총질이 전부였다. 차라리 팔로마 역을 맡은 아나 데 아르마스가 페어로는 더 어울렸던 것 같다.
두 번째로 이성적이고 합리적 선택을 하는 MI6의 수장 M, 말로리는 이번 영화에서 헤라클레스를 이용하기 위해 독단적 선택을 하고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본드의 대사를 빌려 위축되고 사리분별에 늙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전반적으로 매력이 너프된 느낌이 있었다. M은 현장요원으로 일하는 본드와 성향이 맞지는 않지만 그의 실력을 믿고 독단적 행동에도 눈감아주는 인물이다. 또한 그런 00 요원들을 통제할 만큼 능력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이번 편에서 그는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수행하지도, 권위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여러모로 007의 상사로 보기는 어려운 느낌이다.
반면 영화에 등장하는 메인 빌런, 사핀의 경우 다니엘 007의 악당으로 꼽혔던 스펙터에 의해 가족이 몰살된 후 새로이 빌런이 된 설정이었다. 뜬금없는 일본풍의 취향 덕분에 일본풍의 가면을 쓰고 기지의 실내를 다다미방으로 꾸며냈다. 기지마저 일본과 러시아의 영토 분쟁지역에 건설했다. 놀라운 것은 사핀의 외향이나 기타 특성에서 그 어떤 일본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일본혼혈 핏줄이라던가 하는 설정 없이 그냥 등장했기에 의문이 들었는데, 감독이 일본 분이더라. 덕분에 악당에게 머리를 숙여 절(도게자) 하는 007을 볼 수 있었다. (ㅎ) 개인적으로 다니엘 007의 악당들은 전부 장애를 가진 인물이었다. 한 쪽 눈이 보이지 않거나 약물로 인해 치아가 괴사되거나, 사핀처럼 독에 중독되어 피부가 얽었거나. 빌런이 너무 잘생긴 상황을 경계해야하는 것은 맞다. 악당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악당을 장애가 있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 역시 신중해야 한다. 그 사람의 악한 행동이 장애와 결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장애를 가진 빌런의 경우 그 어떤 성적 매력을 가진 상황을 그리지 않는다. 차라리 서사가 있고, 매력적으로 그려진 장애인 악당이었다면, 참작의 여지라도 있었겠지만, 이 영화에서 악당을 그린 방식은 심히 잘못되었다.
그 외에도 007을 보조하던 머니페니, 뉴 007, Q, 팔로마 요원, 메들린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무매력으로 그려졌다. 다니엘 본드의 마지막 편이어서 다니엘을 돋보이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고 새로운 캐릭터인 사핀의 등장을 잘 그려내기 위해서 였다기에도 애매하다. 스카이폴에서 007을 보조하던 현장요원에서 M의 비서로 이직한 머니페니의 행동이라던가, 자신의 선배인 제임스 본드에게 당당히 자신이 새로운 007 이라고 밝히던 요원의 활약상이 거의 전무했다. (심지어는 영화의 마지막에 007 넘버를 제임스 본드에게 반환한다. 존경심에서 우러났다기에는 그 요원은 그럴 인물이 아니다.) Q를 등장시키기 위해 아주 가볍게 사용된 해킹장면은 Q에 대한 모독에 가까웠다. 일회성으로 사용된 듯한 CIA요원 팔로마는 몇주-개월의 기본교육만 듣고 현장에 투입되어 천진난만하면서도 완벽한 액션으로 요원 대선배인 본드의 칭찬을 받았었는데, 이 캐릭터 역시 한 시퀀스에 등장하기에는 아까운 캐릭터이다.
이 영화는 시리즈를 이어나가기 힘들게 설계된 영화이다. 스펙터라는 단체가 너무 쉽게 죽었고, “액션 씬을 매우 못 만들었으며”, 메인 빌런과의 심리전이나 대치 상황을 너무 싱겁게 표현했다. 캐릭터의 매력도 죽이고, 캐릭터도 죽이고, 영화도 죽여 놓은 이 영화 매우 추천하지 않는다.
(다음 007은 21세기에 맞게 흑인을 뽑니, 여성을 뽑니 말이 많다. 있는 유색인종, 여성 캐릭터 관리만 잘해도 반은 먹고 들어갈 텐데.)
-모든 것을 차치하고, 다니엘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카지노 로얄부터, 노 타임 투 다이까지. 나의 첫번째 본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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