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사랑 엄마의 사랑 영상 저널
다큐멘터리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우리는 폐지 줍는 할머니의 삶부터
교도소에서 아기를 출산한 엄마의 삶까지 다양한 인생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다큐멘터리로부터 무엇을 얻어야 할까?
누군가는 감성적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동정을 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세상에 분노할 수 있다.
보통은 1차적으로 ‘슬프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불쌍하다며 동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소수는 잘못이 없는데 잘못되게 살아가는 이들을 도우려 세상을 바꾸자 할 것이다.
나는 어느 지점에 서 있을 까.
아기는 죄가 없다. 세상에 나쁜 탄생은 없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태어난 것이 죄라고 말하는 이들을 만나곤 한다.
타인의 잘못은 너무 쉽게 비난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은연중에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타인을 인도하려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태어날 아이들에게 가난만을 물려주니 아이를 많이 낳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태어난 아기가 내 인생을, 나의 딸의 인생을 망쳤다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소리친다.
우리는 문제의 해결지점을 찾기보다, 비난할 대상을 찾는 것을 더 쉽게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의 비난은 점점 더 약자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이른바 고양이 걷어차기 효과처럼 말이다.
아기의 엄마는 죄가 있을까? 그녀는 죄가 있다. 절도, 그녀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죄 말이다.
그 죄 말고 그녀에게 물을 수 있는 죄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가 임신을 한 것을 비난하고 싶은가?
그녀가 부모에게 버림받고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인생이라,
섹스로 쾌락을 즐기면서 피임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싶은가?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다.
어떤 경우에는 피임을 하는 것이 죄, 어떤 경우에는 피임을 하지 않는 것이 죄라면, 그것은 절대 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녀는 어두운 자신의 과거를 반면교사삼아 자신의 아이를 최선으로 키우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는 타인에게 기꺼이 도움을 요청했으며 자식을 위해 일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 둘의 힘든 삶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저 둘의 힘든 삶은 저 둘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둘을 이렇게 만든 사회를 지탄해야 옳지 않을까.
태어난 아기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이름 모를 남성, 아버지에게 양육비 청구를 해야 하지 않는가.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비난을 몸소 받아갈 하나의 개체를 찾았다.
이 다큐는 오래 전의 것이라 지금 나온다면야 여론이 다르겠지만,
그 당시의 대중들은 아기가 불쌍하다 등의 1차적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기의 아버지가 태어난 아기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에게 양육비 소송을 청구해야함을 주장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아이를 책임지지 않으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비난하고 양육비 소송 시에
아이의 엄마에게 발생하는 육아 문제, 면접 교섭 문제에 대한 대한민국 사법체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드디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쏟을 구멍을 찾았고 이 다큐멘터리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드러냈다.
아직은 이르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그때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여전히 아이를 낳은 엄마는 아이 인생을 망치려 든다고 욕을 먹고,
아이의 아버지는 양육비를 빌미로 아기와 여성을 휘두르려 한다.
양육비를 제때 주지 않아도 압류되는 재산 하나 없다.
돈으로 사람을 휘두르는 천박한 자본주의는 여전히 잘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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