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비인간
블레이드 러너 영상저널
우리는 왜 사람인가. 생각을 해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이 있어서?
우리가 인공지능과, 복제인간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이제껏 봐왔던 몇 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마음을 가지고 있는 로봇, 냄새가 없는 사람, 기억도, 생각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은 아닌 인공지능...
영화에서는 복제인간이 자신을 인간이라고 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맞는 말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기억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인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복제 인간이라고 부를 뿐.
당신이라면 어떤가? 당신의 기억을 가지고, 당신의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존재가
당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 ‘복제인간’ 역시 당신을 복제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둘 중 누가 진짜 인간이고 누가 복제인간이란 말인가. (이 내용은 영화 ‘아일랜드’를 보고 생각하자)
영화는 이러한 딜레마들을 다루고 있다.
타인의 기억을 가지고 만들어진 복제인간들,
스스로 생각 할 수 있고 스스로 학습 할 수 있게 만들어진 그들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이 보인다.
노예로 부리던 복제인간들이 반란을 꾀하자
보는 즉시 사살이라고 하며 이제 와서야 복제인간을 없애려 하는 인간들.
그런 와중에 자신이 복제인간인 것을 모르는 복제인간도 수두룩하다.
복제 인간을 죽이는 인간들조차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부드러운 피부와 그 밑에 흐르는 피, 멈추지 않고 뛰는 심장만으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각해야하고, 배워야 하며, 따듯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스스로 생각하는 자를 ‘나댄다’ 라고 표현하고 배움을 경시하며
따듯한 마음을 가진 자를 무시를 한다.
영화의 배경인 2019년 11월에는 말 그대로 복제인간보다 못한 것들이 길거리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드는 생각은 딱 하나.
이 사람은 인간이 맞나?
사실 모두가 복제인간인건 아닌가?
블레이드 러너는 어떻게 복제인간을 찾는 건가.
당신은 복제인간과 인간을 구별할 수 있을까?
당신에게 총알이 딱 하나 있다면 그 한발을 정확히 쏠 수 있겠는가.
인공지능과 복제인간, 인간이 아닌 것들과 인간의 괴리는 갈수록 좁혀져 가고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이 영화를 보고 생각해야 할 것은 단 하나이다.
당신은, 당신이 인간이라고 확신하는가.
여담이지만, 영화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
상영작과 감독 판, 파이널 컷 판이 모두 다르게 끝이 난다고 하니
어떤 영화를 봐야하나 고민이겠지만,
영화를 하나의 예술로 취급할 것이면, 사업의 입김이 덜 들어간, 감독 판이나 파이널 컷을 추천한다.
실제 상영작은 닫힌 결말로 끝이 나지만 감독 판은 열린 결말로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몇몇 장면들도 감독이 의도한 바를 나타내기 위해서 수정되지 않고 나왔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영화는 여전히 예술과 산업 사이에서 떠돌고 있고
두 부류 모두 각자의 이익을 놓지 않는다.
남의 돈으로 예술하는 거 아니다 라는 말과 예술이 없다면 예술 산업도 없단 말이 모두 이해는 가지만,
상영작과 감독판 모두를 보아야 하는 관객의 입장은 어떠하겠는가.
결말을 수정하는 건 영화 자체를 쥐고 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뉴스의 편집권이 언론사 데스크에 있어야 하고,
영화의 편집권이 감독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포털이나 스튜디오나 돈으로 ‘갑’질하는 것 같긴 하다만.
이 또한 인간적 처사이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