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영화

내가 사랑한, 나를 싫어하던 것들에 대하여

silversong 2021. 3. 19. 01:00

델마와 루이스 영화 저널

 

 

얼마 전 나는 개인 SNS에 한 가수의 뮤직비디오에 대한 칼럼을 작성했다.

여성의 몸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여성과의 성관계를 상징물로 만들어 소재로 사용한 그 노래,

그리고 그 노래의 뮤직 비디오.

키치한 색감과 아름다운 영상미는 많은 팬들의 감탄사를 자아냈고 나 역시 그 노래를, 그리고 그 영상을 좋아했다.

그리고 기분이 나빴다. 내가 10, 20대를 겪으며 본 영화들은 확고했다.

남성의 시각으로 남성적인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나는 그것들을 좋아했다.

평범한 주인공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예쁜 여자, 화려한 액션과 흥미진진한 스토리.

그렇게 나는 영화와 사랑에 빠졌으나, 애석하게도 그것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알고 처음으로 여성 주연의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감정.

이상하게도 그것은 불편함이었다.

 

그 영화는 여성이 주인공이었고,

히로인이라고 불리는, 과제를 완수하면 부차적으로 딸려오는 로맨스의 대상이 젊고 잘생긴 남성이었다.

권력을 가진 여성이 있었고, 멍청한 남성이 있었다.

불편했다. 내가 아는 영화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제까지 내가 사랑한 영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구나.

내가 만약 내가 사랑했던 영화에 출연한다면,

아마 멍청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실없는 농담만 하던, 주인공의 친구가 사귄 금발의 웨이트리스였겠구나.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아무리 그 영화를 사랑해도,

해적 선장이 될 수도,

장군이 되어 명령을 내릴 수도,

총을 쏘는 현장 요원이 될 수도 없었겠구나.

 

델마와 루이스는 나를 사랑하는 영화이다.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해 주고 나의 이야기를 해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내가 출연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유조선을 폭파시키는 무장 강도가 될 수도 있고,

잘생긴 남자와 하룻밤의 재미를 보는 기혼녀가 될 수도 있다.

 

여성이 주연이 되는 영화를 볼 때 나는

부지불식간에 친구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들이 되었다가,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평생의 우정을 다지는 써니나미가 되었다가,

크게 한탕하려는 오션스8’데비를 친구로 두고,

남자로 실없는 농담이나 치는 고스트 버스터즈홀츠먼과 동료가 된다.

 

대학교에 가면 나는 여대생이 되겠지만, 여대에 가면 나는 대학생이 된다는 말.

여성 주연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남성 중심의 영화에 출연한 나는 떠난 남자를 기다리는 성녀나, 떠나온 남자를 유혹하는 창녀가 되겠지만,

여성 중심 영화에서는 내가 길을 떠나는 주인공이 된다.

 

나는 이것을 20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주변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가.

오션스8에서 박물관을 털 준비를 하던 산드라 블록은 이런 대사를 남긴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도둑이 되고 싶어 하는 어린 여자 아이를 위한 일이야.”

 

여성 주연 영화는, 자라나는 여자 아이들에게 누군가의 애인, 어머니로 살기보다는

누군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생겨나야 한다.

때문에 나는 최근 몇 년 간 여성 주연 영화의 필요성에 대해 크게 공감하고 있다.

전통적인 프랜차이즈 영화의 성 반전 버전부터 시작해 오리지널 스토리까지, 많은 여성 주연의 영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장르가 단순히 로맨스, 퀴어에서 그치지 않고 액션, 스릴러 등 다양한 분야로 뻗어 나가기를 바란다.

덧붙여 이러한 영화들이 페미라는 딱지가 붙지 않기를 바란다.

남성 주연의 액션 영화에 성차별’, ‘남성우월주의등의 딱지가 붙지는 않으니까.

 

거의 30년 전에 나온 이 영화는 페미니즘이라는 수식어를 떼더라도 훌륭한 영화이다.

전형적인 로드무비에, 폭파되는 차, 매력적인 캐릭터들까지.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이 영화는 지금 나와도 훌륭한 페미니즘영화가 될 것이다.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발전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교묘하게 나빠졌다.

현재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이하 삼토반) 은 여성 주연의 영화로

장르를 따지자면 실화 바탕의 코믹 드라마 정도가 될 것이다.

오랜만의 여성 주연 영화가 반갑지만,

이 영화로 주목받는 것이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이 아니라,

80년대 스타일링과 화장법, 레트로한 감성뿐이어서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게다가 인터넷에는 삼토반페미영화인지를 묻는 글이 많다.

의도는 명확하다. 페미 영화라면 보지 않겠다는 마음.

그 당시에 델마와 루이스를 본 관객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이 영화를 보고 페미니즘 영화냐고 묻고,

델마와 루이스의 아픔에 공감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패션에 대해 감탄하고?

 

세상은, 어떤 면에서, 참 여전하다.